해방 강화를 향한 각성

2.해방 강화를 향한 각성

아편전쟁
아편전쟁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서방 국가에 파급되어 그 세력은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로 확대 됐다.
텐메이(天明) 6년(1786)에 저술 된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의 『해국병담(海国兵談)』에는 에도만 해방(江戸湾海防)의 필요성이 해설 되어 있었으나, 그러한 가운데 쇄국 일본의 문을 처음으로 두드린 것은 제정 러시아 사절 락스만의 내항이었다.

ロシア使節ラクスマン

제정 러시아 사절 락스만의 내항(1792)

또한 덴포(天保) 10년(1839), 에가와 타로자에몬 히데타쓰(江川太郎左衛門英龍)는 에도만 순견(巡見)의 복명서로 훗쓰미사키(富津岬) 해중에 다이바를 건설할 것을 막부에 제안하고 와타나베 카잔(渡辺崋山)은 그것을 바탕으로 「에도만 해방 계획도(江戸湾海防計画図)」를 작성했다.

덴포 11년(1840), 아편전쟁으로 인한 청나라의 패배가 막부에 큰 충격을 준 것과 더불어 외국 선박에 의한 사건이 빈발했던 것을 계기로 막부는 해방 강화의 중요성을 깨쳤다. 개국해야만 하는 필연적 상황 아래, 카에이(嘉永) 6년(1853), 미국 페리 함대의 우라가(浦賀) 내항을 받아 들이게 된다.

マシュー・ペリー

페리

黒船ミシシッピ号

함선 미시시피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