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해보

제3해보의 건설

가장 난사였던 제3해보

제3해보는 제2해보보다 남 2,611m, 하시리미즈저포대보다 북2,589m의 위치에 있고 수심이 약 39m나 있어 조류도 격렬하여건설공사는 메이지 연간 군사토목 최대의난사가 되었습니다.。
(사)토목학회:’메이지업사 토목편’ (1929.7.31)에 제3해보 건설에 관해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第三海堡基礎上部仮設計図

3해보 기초 상부가설계도
메이지 43(1910) 2
현대본방축성사 2 1 도쿄만 요새축성사 부록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報知新聞 明治40年(1907)10月28日 国立国会図書館所蔵

報知新聞 明治40年(1907)10月28日 国立国会図書館所蔵

삼해보 건설의 시작(1892)

사석 위에 할율석을 쌓아 올려 만조면상은콘크리트로 굳혀 제방을 쌓았습니다.
제방 내부에는 모래를 충전했습니다.

모래 지반의 지지력을 측정하기 위해 재하시험을 실시하여 지반허용 지지력을 18톤/㎡로 정했습니다.

第三海堡基礎上部仮設計図

3해보 기초 상부가설계도
메이지 43(1910) 2
현대본방축성사 2 1 도쿄만 요새 축성사 부록’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第三海堡断⾯図

3해보 단면도 메이지 39(1906)(추정)
방위연구소 소장

수없이 높은 파도에 파괴된 제방

그러나, 이와 같이 힘들게 축조한 제방도, 메이지 32년(1899) 10월, 35년(1902) 9월의 고파에 의해서 어이없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거듭되는 고파에 의한 파괴에 대해서 마침내 100~150톤의 콘크리트 블록을 설치했습니다만, 이것도 1911년 7월의고파에 의해서 파괴되어 5명의 행방불명자를 내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길이 14m, 고도 7m, 상폭 4m, 바닥폭 6m, 무게 1,500톤의 철근 콘크리트케이슨 13함으로 이루어진 방랑제를 전면에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 타이쇼 6년(1917) 9월의 고파에의해, 6개는 이동해, 6개는 기울어져, 원위치에 머무른 것은 불과 1개라고 하는 참상을 나타냈다.

이에 반해 무게 35톤의 콘크리트 블록 713개를 투입해 겨우 안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공사비는 약 115.7억엔

제3해보는 1912년 3월에 준공 예정이었으나, 드디어 준공된 것은 다이쇼 10년(1921)이었습니다.
메이지 40년(1907)까지의 공사비만으로249만엔(현재의 가격으로 약 115.7억엔)이나 들었습니다.

제3해보의 병비

제3해보에는 15cm 가농포 4문, 10cm 가농포 8문의 대포와 탐조등 등이 설치되었습니다.

렌네 소령의 진단 “세계에 전례가 없는 무모한 일”

1901년, 축성 본부장이었던 이시모토 신로쿠 중장은 축성의 대가인 독일의 렌네 소령한테 건설 중인 제3해보공사를 시찰 받고, 이 사업의 성패에 대한 의견을 구했습니다.

렌네 소령은 전 “세계에서 이렇게 깊은 바닷속에 구조물을 건설한 예는 없다.제3해보와같이, 풍랑 강대한 외해에 직면한 수심40m 이상의 바다 속에 건설하는 것은 오히려 무모하다.따라서 이 완성을 위해서는 최선의 주의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침강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초 위에 모래를담아 압력을 가해 모래층을 압박하는 것이좋다”고 말했습니다.당시 세계적으로도 드문 대참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第三海堡潮流方向図

3해보 조류 방향도
메이지 39(1906)(추정)
현대본방축성사 2 1 도쿄만요새 축성사 부록
국립국회도서관 소장